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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과 천의 우주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셰힐라 힉스의 작품이 착륙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시 전경. Sheila Hicks, ‘Another Break in the Wall(벽 속의 또 다른 틈)’, 2016, sticks, cotton, linen, pigmented acrylic fibre, variable dimensions ⓒSheila Hicks / Adagp, 2024 Photo: Lee Hyunseok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전시 전경. Sheila Hicks, ‘Atterrissage(착륙)’, 2014, pigments, acrylic fibre, variable dimensions ⓒSheila Hicks/ Adagp, 2024 Photo: Lee Hyunseok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의 전시장이 셰일라 힉스(Sheila Hicks)의 작품으로 가득 채워졌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컬렉션의 일부이자 힉스의 상징적인 두 작품 ‘착륙(Atterrissage)’과 ‘벽 속의 또 다른 틈(Another Break in the Wall)’이 서울에 처음으로 도착한 것이다. 동글동글한 조약돌 같기도 하고 자가 증식하는 식물의 포자 같기도,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 같기도 한 물성의 작품들이 의기양양하게 공간을 점령하며 기묘한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실과 천의 우주 안에서 셰일라 힉스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낸 예술가를 떠올리기란 어렵다.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웨일스, 체로키 등 다양한 문화적 뿌리를 지닌 가문에서 성장한 셰일라 힉스는 1954년 예일대학교에 입학해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인물들을 만난다. 루이스 칸(Louis Kahn)에게 건축학에 대한 수업을 들었고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유명한 색채학자인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와 함께 공부하며 자연스레 색의 병치와 조화를 탐구했다. 또한 요제프 알베르스의 아내이자 텍스타일 아티스트 아니 알베르스(Anni Albers)를 만나 직조 기술을 연구하기도 했다. 졸업 후 힉스는 위빙과 자수 기술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라틴아메리카로 떠났고, 멕시코에서 거주하는 동안 펠릭스 칸델라(Félix Candela)나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 같은 건축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힉스의 작품이 건축물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배경이다. 힉스는 이후 무수히 많은 건축가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패션이나 인테리어, 태피스트리에 한정되어 있던 직물이라는 재료를 먼 곳까지 데려갔다. 재료를 재활용하고 같은 단위의 작품을 공간에 따라 다르게 배치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내는 힉스의 작품은 매우 유연한 태도로 자생하며 거대한 건축물에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뽐낸다. 바우하우스에서 텍스타일 아트는 주로 여성들에게 권장되는 예술이었지만, 힉스의 작품은 여성성이나 내면적인 성찰에 머물지 않고 그 너머로 대담하게 뻗어나갔다.

Sheila Hicks, ‘Blue evasion’, 2023, synthetic fibers, dimensions variable Photo: Oliver Roura Courtesy of the artist, Meyer Riegger, Berlin/ Karlsruhe/ Basel, and galerie frank elbaz, Paris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기관, 건축가들과 협업해왔고 기념비적인 작품과 전시를 만들었으며, 90세인 현재까지 무수한 작품을 쏟아내고 있는 셰일라 힉스가 자신의 일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 재밌다.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 하루 일과와 업무에 대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하고 싶다는 기자의 말에 힉스는 “나에게는 업무랄 것이 없어요(I don’t have a career)”라고 대답했다. 자신은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 자신에 도전하며, 깨어 있고 살아 있는 것들에 주목한다고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지 않고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으며,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작품을 느끼라고 권한다. 관객들에게 작품을 만져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나아가 관객들이 작품 사이를 통과하고, 작품 위에서 눕거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기도 한다(사실 복슬복슬한 질감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을 보면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참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강렬하게 ‘만지고 싶다’). 언젠가는 성공이나 유명세에 대한 질문에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니에요(It’s not my fault)”라고 재치 있게 답하기도 했다. 자신은 그저 재미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실로 한 작업에 명예 학위를 주는 사람들이 무언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웃음)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며 인생의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에요. 나는 심각한 사람은 아니지만 무정하고 황폐한 세계에 대한 반항심을 가지고 있어요. 항상 새로운 시도를 하고, 그중 절반은 끔찍한 실수지만 계속해서 도전하죠. 내 작업을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은 아마도 충동일 거예요.”

Sheila Hicks, ‘VERS DES HORIZONS INCONNUS’, 2023, pigmented acrylic fibers, 600cm Photo: Itaka Martignioni Courtesy of the artist, galerie frank elbaz, Meyer Riegger and galleria Massimo Minini

그러니까 셰일라 힉스는 실과 양모, 나일론, 실크, 리넨 같은 것들로 평생 재미있는 놀이를 해온 것 같다. 동글동글한 섬유 덩어리를 쌓아놓는다거나 창문 아래로 덩굴을 흘러내리게 하고, 정원 한복판에 섬유 기둥을 세우거나 천으로 만든 색색의 버섯을 심어놓는 식으로 말이다. 원재료의 특성을 존중하는 그의 작품은 수직으로 떨어져 땅에 닿는 지점부터 수평적으로 구부러지고, 중력에 거스르는 듯한 형태를 유지하기도 하며, 풍요로운 색을 통해 작품이 속한 공간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이처럼 셰일라 힉스의 작품은 우주의 질서와 고정되지 않는 삶을 담고 있다. “나의 작업에서 중력은 큰 역할을 해요. 중력을 반영하기도 하고 중력에 반항하기도 하죠. 계속해서 변형되고 움직이는 것 또한 내 작품의 특징이에요. 오늘 작품을 본 관객이 다른 날에 다시 찾았을 때 다른 형태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재료에 기대하는 물성을 장난스럽게 거부하기도 하죠.” 힉스는 작품들이 고정된 형태이기를 거부하며, 작업 환경과 과정에 따라 자유롭게 진화하는 생명체이길 바란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은 유연하고 불안정한 형태로 그저 존재한다. 존재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이 말이다.
셰일라 힉스 작품 세계의 중심에는 그가 가진 고유한 미감이 있다. 유연한 태도로 재료와 과정을 대하는 그는 자신이 세운 미적 기준만큼은 엄격하게 고수한다. 그리고 그 미감의 뿌리는 자연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파리 한복판에 정원이 있는 집에서 생활과 작업을 이어나가는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중요한 요소다. 정원이나 자연적인 환경에 놓여 야생성을 뿜어내는 힉스의 섬유 조형물은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이끼가 번식하고 버섯이 자라나는 것처럼 세상에 계속해서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우리의 관심을 빼앗아가는 요소가 너무 많은 환경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이런 것들이라고 말이다. 셰일라 힉스의 작품은 한 대상을 진득하게 관찰하는 법을 알려준다. 힉스가 과거에 남긴 말 중 세상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삶의 태도를 발견했다. “어떤 것을 계속해서 관찰해보세요. 그리고 손으로 만져보세요. 예를 들면 티백 같은 것은 습기가 있어 흥미로운 모양이 되죠. 색과 빛, 모양, 길고 짧은 시간 등 세상에 관찰할 대상은 너무 많아요.”

Editor
KIM JIS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