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다니엘 아샴의 시간
롯데뮤지엄에서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서울 3024>
롯데뮤지엄에서 열린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서울 3024> 설치 전경. Photo by Heo Junghak ‘Fractured Idols VI’, 2023, acrylic on canvas, 285.8×250.2×8.6cm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법한 조각상, 강력한 무기처럼 생긴 니콘 카메라,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농구공, 그리고 개체수가 너무나도 많은, 인류의 정신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한 검정색 네모난 기기가 미래의 어느 날 발견된다면? 종말 이후에 지난 문명을 탐구하는 이들은 현인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가장 동시대적인 미술가 중 한 사람인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작품은 이러한 생각에서 시작된다. ‘현시대의 거의 모든 물건이 미래에는 유물이 된다.’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뒤섞어 매혹적인 혼돈을 빚어내는 그는 수동 카메라, 전화기, 카세트 플레이어 등의 일상적 물건들을 석고나 화산재 같은 광물을 소재로 주조하고 인위적으로 부식시켜 마치 미래에서 발견된 듯한 가상의 유물로서 제시한다. 정작 미래의 인류가 다니엘 아샴의 작품을 발견하면 어떤 생각을 할 것 같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남아 있을 오브제를 만든다는 것은 녹록지 않은 일이죠. 저도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데, 아무래도 재료의 특성상 동으로 만든 물건들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은 것 같아요. 어쨌든 시간성을 혼란하게 표현하는 제 작품의 특성상 미래의 고고학자들이 콘텍스트나 배경 지식 없이는 굉장히 헷갈릴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Still Life with Bust of Deified Rome Blue’, 2023, acrylic on canvas, 191.8×161.3cm. Photo by Guillaume Ziccarelli.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다니엘 아샴이 롯데뮤지엄에서 진행하는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았다. 7월 12일부터 10월 13일까지 열리는 다니엘 아샴의 개인전 <서울 3024>에는 조각, 회화, 설치 등을 아우르는 작품 250점이 모였다. 작가의 세계관이 집약된 장소 특정형 작품인 ‘발굴 현장(Excavation Site)’도 펼쳐져 있다. 다니엘 아샴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강렬한 삶의 경험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유년 시절을 보낸 마이애미의 광활한 자연과 인공적인 건축의 공존, 그리고 남플로리다를 강타한 허리케인 앤드루로 인한 트라우마적인 경험이다. 그의 초기작은 주로 이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두 번째는 2010년에 루이 비통의 커미션 작업을 위해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이다. 그는 발굴 현장에서 작업하는 고고학자와 불가사의한 유물에 영감을 받아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당시 굉장히 흥미로운 장소라고 생각했던 이스터섬에서 6주 동안 머물렀어요. 이스터섬은 ‘모아의 석상’으로 유명하죠. 그곳에서 많은 쓰레기가 있는 장소를 발견했어요. 폐기된 차의 부품, 컴퓨터 등이 섬을 떠나지 않고 모여 있었어요. 모아의 석상과 컴퓨터 같은 물건의 시간적인 간극을 비틀어보게 되었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들을 지질학적인 재료로 재탄생시켜서 미래로 가져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때 ‘상상의 고고학’ 개념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시간성에 혼란을 야기하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설치된 ‘발굴 현장’은 지금으로부터 1000년 후 폐허가 된 서울을 상상하게 한다. 다니엘 아샴은 이번 서울 전시에서 이 공간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많은 도시에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왔는데, 전시를 기획할 때마다 관객들을 위해서 하나의 여정을 만들고자 하는 편이에요. 롯데뮤지엄의 전시 공간에 있는 복도라든지 다양한 동선의 경로가 여정을 만드는 데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다고 생각해요. 각각의 전시장이 새로운 느낌을 만들어내죠. ‘발굴 현장’은 관객 참여형 작품이에요. 관객이 직접 종이 한 장을 들고 발굴 현장에서 드로잉을 그리거나 글을 써 내려갈 수도 있는데, 이 종이를 반으로 찢어서 일부는 전시장 벽에 붙이고 일부는 집에 가져갈 수 있는 형태예요.” 실제 발굴 현장처럼 구성된 공간에서 관람객은 마치 유적지를 탐험하듯 현대의 유물을 직접 그려보거나 조사서를 작성할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시간의 흐름과 우리의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시간성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는 삶을 바라보고 다양한 경험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죠. 그래서 시간성을 압축하거나 확장하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 너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해요.”
왼쪽 ‘Athena Helmeted Found in Bukhansan 3024’, 2024, acrylic on canvas, 157.5×172.7cm ©Daniel Arsha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오른쪽 ‘Rome Deified Found in Bukhansan 3024’, 2024, acrylic on canvas, 157.5×172.7cm ©Daniel Arsha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또한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1000년 후 서울을 주제로 한 대형 회화 2점을 새롭게 작업했다.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헬멧을 쓴 아테나 여신(Athena Helmeted Found in Bukhansan)’과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Rome Deified Found in Bukhansan 3024)’은 웅장한 북한산과 고대 그리스 조각상을 병치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며, 시공간을 초월한 신비로운 미래 세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제작하며 북한산이나 나무와 관련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봤어요. 서양의 풍경화와 동양의 풍경화는 묘사 기법이 굉장히 다른데, 이 둘을 한데 융합하고자 했어요. 또한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어떤 복음에 어울릴 것 같은 색채예요. 저는 색맹이기 때문에 색채 작업 과정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죠. 이 작품에서는 몇 가지 색이 함께 섞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다니엘 아샴의 작업에서 흰색의 의미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의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색깔은 흰색이며, 본인과 스튜디오 직원들도 실험실 복장 같은 흰색 유니폼을 즐겨 입는다. “제가 보는 색이 남들이 보는 색이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 만든 초기 작품들은 색감이 많이 배제된 채 흰색이 주로 사용되었죠. 지금은 시력을 교정해주는 렌즈가 개발되어서 더 많은 색감을 볼 수 있어요. 또한 제 스튜디오에는 12가지 색상을 넘버링으로 구분해놓았어요, 스스로 어떤 색깔인지 추측하기보다는 숫자의 도움을 빌려서 작업을 하고 있죠.”
왼쪽 ‘Bronze Stainless Steel Venus Italica Bust’, 2021, bronze, stainless steel, wood, 50.8×50.8×33cm ©Daniel Arsha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오른쪽 ‘Amethyst Crystallized Mimikyu’, 2022, amethyst, quartz, hydrostone, 63.5×61×49.5cm ©Daniel Arsham.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전시장을 걷다 보면 나타나는 또 하나의 재밌는 공간은 ‘포켓몬 동굴’이다.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매우 적절하게 선택해 작품의 주제로 삼는 다니엘 아샴이 특히 사랑하는 포켓몬은 작품 속에서 퇴색되고 부식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또한 2020년에 포켓몬 원작 애니메이션 감독 유야마 구니히코와 협업해 포켓몬 세계와 자신의 세계관을 연결하는 스토리의 에피소드 <시간의 파문>을 제작하기도 했다. 2년에 걸쳐 제작한 이 영상은 주인공인 지우와 피카츄가 다니엘 아샴 캐릭터와 시합 중 우연히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포켓몬 세레비는 시간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오가는 캐릭터다. 작가는 시간 여행을 하는 세레비의 능력을 통해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 세계를 포켓몬 세계와 연결한다. “포켓몬 시리즈와의 컬래버레이션은 5~6년 전에 시작했어요. 저뿐 아니라 제 아이들도 포켓몬 세계관의 열성 팬이에요. 그래서인지 제가 왜 이러한 작품을 하는지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고대와 현대의 우상을 상징하는 형상을 병치한 ‘분절된 아이돌(Fractured Idol)’ 시리즈도 눈길을 끈다. AI를 활용해 고전 조각상의 얼굴과 현대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다채로운 표정을 한 화면에 대비시킨 작품이다. “지난 1년간 분절된 얼굴 작품 작업을 해왔고, 서로 다른 재료를 섞어서 작품을 만드는 일에도 흥미를 느끼고 있어요. 미래와 과거의 느낌을 담고 있는 재료를 섞는 것이죠. 이 주형을 만드는 작업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수년에 걸쳐서 기술을 연마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Quartz Eroded Hamadryade’, 2019, quartz, selenite, hydrostone, 180×85×80cm, Photo by Claire Dorn. Courtesy of the artist and Perrotin
다니엘 아샴의 작품과 전시는 그 자체로 SF 영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 전시에는 어린 시절에 영화 <백 투 더 퓨처>나 스티븐 스필 버그의 SF 영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다니엘 아샴에게 영향을 준 고전 영화와 관련된 ‘31세기 시네마’ 방도 있다. 그 방에 머물다 보면 어린 시절의 다니엘 아샴은 어떤 아이였는지 궁금해진다. “굉장히 조용하고 혼자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생각을 하는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을 해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다. 다니엘 아샴이야말로 드물게 외향적인 예술가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스타그램에서 활발하게 작업 과정을 공개하고 삶과 예술에 대한 단상을 공유하며, 그의 계정을 팔로하는 사람들의 수는 144만 명이나 된다. 인터뷰를 위해 다니엘 아샴을 기다리던 중에도 그는 인스타그램에 “오늘 오후에 롯데뮤지엄을 방문할 예정이니, 나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잠시 후에 전시장에서 보자”는 스토리를 올렸다. 친화력 좋은 사람이 벌일 만한 이 모든 활동은 다니엘 아샴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 ‘예술의 접근성’과 관련이 있다. 그는 예술 작품은 쉽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디다스, 리모와, 디올, 티파니, 그리고 퍼렐 윌리엄스, 현대무용의 전설로 통하는 머스 커닝햄 등 수많은 대상과 협업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협업의 예술’은 다니엘 아샴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주로 제가 좋아하는 브랜드와 협업을 해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좋아했던 빈티지 포르쉐와 스포츠 의류 브랜드 나이키가 대표적인 예죠. 음악계나 패션계에서 일하는 친구들과 협업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협업의 목적은 무엇보다 제 작품을 접하는 관객층을 확장하고자 하는 데에 있어요. 일례로 10년 전에 아디다스와 한 작업은 10대 아이들 같은 미술 관객이 아닌 새로운 관객에게 다가가는 기회가 되었죠. 뮤지엄이나 갤러리가 없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접근 가능성을 높이려고 해요.” 전시장의 마지막 즈음에는 다니엘 아샴이 본인의 스튜디오에 있는 개인 소장품을 통째로 가져와서 구상한 방이 있다. 그가 어떤 공간에서 작품을 구상하는지, 평소 어떤 옷을 즐겨 입는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목적은 지금까지 진행했던 다양한 협업 프로젝트를 제가 보여주고 싶은 방식으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전시장에 들어서자 다니엘 아샴은 바로 이 방에서 자신이 약속했던 대로 서울 관객들과 만나고 있었다. ‘셀프’로 진행한 관객과의 만남인 셈이다. 그의 인스타그램에서 본 한 구절이 떠올랐다. “예술은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Art is not what you see, It’s what you make others see).”
Editor
KIM JISEON
Photographer
LEE JAE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