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사적인 어워드 2024

올해 최고의 순간과 기념비적인 장면을 기록해보았다.

202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작품을 선별해 엮은 <디 에센셜>.

올해의 인물, 한강
한강이 쓴 소설 찾기 게임이란 걸 한번 해보자. 우선, 책장 앞으로 간다. 꽂혀 있는 소설들을 소설 속 세계에 계속 머물고 싶은 책과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은 책으로 분류한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는 적합한 분류 기준이 아니다. 소설 속 세계가 끔찍하냐 끔찍하지 않으냐가 더 정확한 분류 기준이다. 갑자기 실종된 연인을 찾기 위해 찾아간 어둡고 쓸쓸한 폐광촌이 등장하는 <검은 사슴> 속 세계, 폭력적인 가부장제를 벽지로 사용한 <채식주의자> 속 세계, 1980년 5월의 광주를 되살린 <소년이 온다> 속 세계, 70년 전 제주의 4월을 그린 <작별하지 않는다> 속 세계를 떠올려보자. 끔찍한가? 그 세계에 내가 속해 있지 않았다는 것이(현재진행형인 문제도 있다) 다행처럼 느껴지는가?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은 세계를 그린 소설들 속에 한강 작가의 책이 있다면 첫 번째 과제는 잘 수행한 것이다.
한강은 끔찍한 세계를 그리는 소설가다. 작중 인물들은 구조적 폭력과 비극적인 삶의 본성 아래에서 슬퍼하고, 말을 잃고, 병을 앓고, 죽음을 맞는다. 한강은 이런 끔찍한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한 소설로 독자로 하여금 소설에 감탄하게 하면서도 소설 속 세계에서 얼른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소설가다. 그러나 이런 소설가는 한강 외에도 존재한다. 두 번째 과제는 첫 번째보다 간단하다. 끔찍한 세계를 그린 소설 중에서 저자가 소설가 겸 시인인지 소설만 쓰는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다시 분류한다. 한강의 책이 전자에 있다면 두 번째 과제도 잘 수행한 것이다. 한강 작가는 소설가로 데뷔하기 한 해 전인 1993년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고, 2013년 첫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태어나 두 달이 되었을 때/아이는 저녁마다 울었다//(중략) 왜 그래,/왜 그래,/왜 그래,//(중략) 그러던 어느 날/문득 말해봤다/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괜찮아./괜찮아./이제 괜찮아.//(중략)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중략) 왜 그래,가 아니라/괜찮아./이제 괜찮아.”- (‘괜찮아’ 중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라고 읊조리는 한강은 끔찍한 세계를 시적 묘사와 대화로 그리는 소설가 겸 시인이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끔찍한 세계를 그리는 소설가 겸 시인은 한강뿐만이 아니다.
마지막 과제는 주관식에 가깝다. 끔찍한 세계를 그리는 소설가 겸 시인의 작품을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작품과 먼 작품으로 분류한다. 고상하지 않은 작가도 고상한 태도와 인격을 강조하는 작품을 쓸 수 있고, 비도덕적인 작가도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작가는 자기 작품과 마치 혼연일체인 듯한 느낌을 준다. 전자에 한강의 작품만 남아 있다면 당신과 나는 심미안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강은 끔찍한 세계를 제3자의 관점에서 내려다보며 우아한 시적 문체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빙의라도 한 듯 저 자신도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 허우적거리며 내파를 감내한다(여담이지만 <작별하지 않는다> 초반부를 읽었을 때 진심으로 한강 작가의 건강이 걱정됐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적나라해 소설을 읽는 사람도 덩달아 앓게 만든다(소설 판매량과는 관계없이, 이것이 한강의 작품이 결코 문턱이 낮지 않은 이유다). 그럼으로써, 이런 자신만의 문학으로 한강은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런 작가의 소설이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이니 뿌듯함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다.
김기창(소설가)

바삭한 식감을 자랑하는 에스콘디도의 도미 튀김 타코.

올해의 파인다이닝, 에스콘디도
‘멕시칸’과 ‘파인’이라는 조합이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그 생경함에서 오는 신선함이 강펀치 같은 인상을 남긴다. 이들은 형형색색의 옥수수알이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토르티야에 사용한 옥수수는 다섯 종류라고 했다. 식사 말미에야 옥수수를 보여준 행위가 어떤 상징성을 띠는지 알아챘다. 에스콘디도(Escondido)에서 토르티야는 모든 디시가 멕시코 음식임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단편적으로 아는 멕시칸 퀴진이 얼마나 다양한 결과 겹으로 이뤄졌는지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가장 먼저 ‘우니 인플라다’가 등장했다. 옥수숫가루로 만든 퍼프 과자에 낮은 온도의 기름에서 천천히 익힌 대구를 으깨 만든 폼을 넣고, 그 위에 성게를 올렸다. 손으로 쥐고 한입에 넣으니 성게가 신선한 바다 향을 풍기며 녹는 동시에 낮은 밀도로 부푼 퍼프 과자와 폼으로 만든 대구 살이 아스러졌다. 과자 반죽으로는 튀겼을 때 가장 부드럽게 부스러지는 ‘핑크 소코율’을 활용했다. 누군가는 맛의 비결을 성게에서 찾을 수 있으나, 이 요리가 호소력 짙은 이유는 대구 살 폼을 넣은 퍼프 과자가 성게의 식감과 풍미를 극대화해서다. ‘줄전갱이 아구아칠레’에서 토르티야는 튀겨진 형태인 토스타다로 등장했다. 선연한 연둣빛의 아구아칠레 주스에 줄전갱이회를 올리고, 그 뒤로 달의 뒷면처럼 둥글고 검은 토스타다를 세웠다. 검은색을 띠는 ‘블루콘’은 튀겼을 때 가장 날카로운 식감을 낸다고 했다. 싱그러운 아구아칠레 주스와 기름지고 찰진 회에 바삭하고 고소한 토스타다까지, 그 다채로운 즐거움에 바닥까지 싹싹 긁었다.
그 뒤로 한동안 타코의 향연이었다. 농어에 아치오테로 만든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구운 후 블루콘 토르티야에 파인애플과 아보카도를 함께 올리고, 태운 토마토로 만든 살사를 곁들여 냈다. 불 향, 아치오테의 독특한 향을 입은 담백한 농어 살에 부재료들이 더해져 입안에서 달고 시고 짜고 고소하고 감치고 부드럽고 아삭거리고 난리가 났다. 그다음으로는 다른 온도에서 두 번 튀겨낸 도미 살에 얇게 저민 복숭아, 살사 베르데를 올린 타코가 나왔다. 붉은색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에 두 차례에 걸쳐 훈연한 할라피뇨를 넣고 인퓨징한 기름으로 만든 치폴레 마요네즈를 깔았다. 이 요리를 먹다가 기름이 튀는 바람에 옷을 버렸다. 하지만 그걸 안타까워하기엔 입이 너무 즐거웠다. 이어 등장한 ‘버섯 토스타다’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블루콘을 튀긴 토스타다에 땅콩을 넣은 살사를 바르고, 하바네로를 인퓨징해 만든 비네그레트를 발라가며 숯불에 구운 참송이버섯, 건조해 튀긴 노루궁뎅이버섯을 올린 후 완두순으로 마무리했다. 식감이 단단해진 버섯을 베어 물자 숯 향과 함께 버섯이 머금고 있던 기름과 즙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땅콩 살사, 완두콩 싹의 고소함이 더해져 육고기 못지않은 풍미를 자아냈다. 에스콘디도는 소고기 스테이크마저 타코로 풀었다. 식감이 가장 부드러운 흰 옥수수로 만든 토르티야에 미디엄 템포로 구운 한우 채끝과 골수를 긁어 올렸다. 보통 스테이크가 나오면 다이닝의 긴 여정이 마무리되는데, 순서도 달랐다. 사골로 만든 콩소메에 초리소를 넣고 튀겨낸 토르티야인 고르디타가 담겨 나왔고, 그다음으로 그라니타 클렌저가 등장하며 주인공이 남았음을 암시했다.
그날의 주인공 ‘몰레 네그로’는 강렬했다. 30가지 식재료를 끓여 만들어 우주처럼 검은 소스 몰레 네그로는 풍미가 복잡다단했다. 거기에 멕시코식으로 지은 밥을 호박잎에 싸고 새우를 넣은 살사를 발라 구운 더덕과 벤자리구이를 올렸다. ‘멕시코 음식=토르티야’라는 생각이 굳어질 때쯤 토르티야 대신 쌀밥이 나온 것도 재미있다. 마지막으로 바나나잎에 감싸 찐 옥수수빵 ‘타말’이 후식으로 나왔다. 이번엔 또 벗겨 먹는 것. 2시간에 걸쳐 한입에 털어 먹고, 부숴 먹고, 긁어 먹고, 입가에 시커먼 양념을 묻혀가며 먹는가 하면, 갖가지 타코를 쌈 싸 먹었다. 움칫 놀랄 만큼 낯선 이름에 망설일 법도 한데, 손을 써가며 먹도록 유도하는 바람에 능동적으로 다이닝을 즐겼다. 코와 입, 눈과 귀는 물론 손으로 기억된 그날의 다이닝을 올해 가장 짜릿한 미식 경험으로 손꼽는다.
이주연(미식 전문 기자)

올해의 디자인, 김기드온의 WMAC#3: F51
김기드온의 암체어는 올해 본 의자 중 가장 아름답다. 작가 매기 넬슨은 파란색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인 <블루엣>에서 이렇게 적었다. “하필 왜 블루입니까? 나는 자주 이 질문을 받는다. (중략) 무엇을, 혹은 누구를 사랑할지 우리는 선택할 수 없잖아요, 하고 되묻고 싶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대답은 파란색에 대한 나의 열렬한 애정의 이유이자 ‘올해의 디자인’으로 김기드온의 암체어 ‘WMAC(Wire-Mesh Armchair)#3: F51’를 꼽아야 하는 이유와 같다.
가까스로 기능을 버티는 선들이 모여 안 보이는 면을 만들어내는 모습. 좌석에는 이브 클랭의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가 떠오르는 채도 높은 파란색 패브릭이 역동적이면서 정갈하게 철제 프레임을 칭칭 감싸고 있다. 생선 살을 발라내듯 기능만 남기고 면을 모조리 발라낸 구조는 냉철하고 차가워 보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것 위에 앉고 싶다는 욕망이 끓는다. 검은색 프레임이 파란색 패브릭의 무대가 되어주기 때문일까. 누구든 이 의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심지어 파란색을 동경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기드온의 WMAC#3: F51을 본 첫인상이다.
의자는 디자인의 꽃이라고 한다. 가구를 만들던 디자이너는 물론이고 건물을 설계하던 건축가도, 그림을 그리던 작가도, 옷장을 짜던 장인도 결국엔 의자를 만들었고 언젠가 의자를 만들게 된다. 왜 그럴까? 의자는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가장 극렬하게 느끼게 만들어준다. 사용자는 먼저 시각으로 의자의 아름다움을 탐하고, 곧바로 신체를 아름다움에 내맡긴다. 작가의 의도는 가감 없이 사용자의 둔부와 허리에 밀착된다. 김기드온은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가 1923년 설계한 교장실과 그곳에 있던 의자 ‘F51’에서 영감을 받아 WMAC#3: F51을 디자인했다. 교장실은 카펫, 타이피스트, 조명 기구 등 바우하우스가 지향하는 가치를 한데 모아놓은 장소였다. 가구들은 기하적인 리듬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각각의 높이까지도 동일하게 조정됐다. 김기드온 역시 교장실 설계도 속 X·Y·Z축이 소실점을 만들어내는 듯한 착각, 공간을 흐르는 일체감에 크게 공명했다. 또한 그가 그로피우스의 교장실에서 느낀 미학적 이상은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을 일관된 조형 언어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기드온의 조형 언어는 WMAC#3: F51이 그로피우스의 F51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게 만든다. 그는 육중한 덩치의 F51에 보기 좋게 구멍을 냈다. 면이었던 것을 선으로, 선이던 것을 점으로 격하시켰다. 그 결과 의자 뒤에 가려 보이지 않던 풍경이 전경으로 불쑥 나타났다. 철제 프레임 사이로 공기가 드나든다. 만약 지금 당장 현금 550만 원이 주어진다면 WMAC#3: F51를 거실 한가운데 놓고 아름다운 로프를 잔뜩 구해서 구멍과 구멍을 사이를 엮으며 놀고 싶다. 정글짐의 철봉과 철봉 사이를 옮겨 다니며 놀던 즐거운 감각이 살아날 것 같다. 바로 이 찰나가 올 한 해 역사적 체어 브랜드가 내놓은 신상품보다도 WMAC#3: F51이 아름다운 이유다. WMAC#3: F51은 상상하게 하고 놀고 싶게 만든다. 노는 감각은 본래 바우하우스의 교육철학(‘놀이가 일이 되고, 일이 파티가 되고, 파티가 놀이가 된다’)이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권위의 그림자를 드리운 바우하우스 유명한 체어 앞에서 ‘놀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역사적 디자이너의 이름이 적힌 머릿속 수첩만 겸연쩍게 뒤적이게 된다. 하지만 이 의자 앞에선 비교적 쉽다.
백가경(<에비뉴엘> 피처 에디터)

놀이의 감각을 일깨우는 김기드온의 의자.

올해의 건축, 야마모토 리켄의 판교하우징
판교하우징은 경기도 성남에 자리한 아파트(산운월든힐스 2단지)다. 판교하우징이 분양되던 2009년, 언론과 시민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한국의 주거 문화와 맞지 않으며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항 같다’ ‘투자 가치가 떨어진다’ 등의 부정적 평가가 뒤따랐고, 분양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어떤 면으로 보나 ‘다른’ 주택을 구상한 건축가는 일본의 야마모토 리켄이다. 올해로 79세가 된 노건축가는 건축 인생의 대부분을 ‘지역사회권’을 주창하는 데 쓴 인물이다. 지역사회권이란 단순히 가족의 사생활을 지키거나 육아를 위한 주택이 아니라 일하고 상품을 만들고 판매하는 ‘개방 공간’이 있는 주택이다. 주민들은 사생활을 위한 전용면적보다 옥상, 파티오, 마당, 서재 등의 공용면적이 훨씬 큰 공간에서 삶을 운용한다. 이러한 그의 철학을 처음 건축으로 실현한 곳이 바로 판교하우징이다. 야마모토는 ‘어떻게 해야 주변 환경, 지역사회와 개인이 하나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판교하우징 설계를 시작했다. 그 결과 모든 주택을 3~4층의 저층 건물로 지었고 2층에는 투명한 유리로 현관홀을 만들었다. 그가 코먼덱(Common Deck)이라 부르는 공간은 모든 주택의 현관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돼 있다. 현관홀은 애초에 노출을 전제로 하여 아틀리에나 갤러리, 손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로 활용하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판교하우징이 완공되고 10년 뒤인 2020년, 주민들은 야마모토를 한국으로 초청해 작은 파티를 열었다. ‘실제로 살아보니 좋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투명한 현관홀의 선호도가 낮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주민들은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공간, 서재, 두 가구가 함께 파티할 수 있는 장소로 가꾸며 살게 됐다. 그리고 올해 3월, 야마모토는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판교하우징은 그의 수상 소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훌륭한 지역사회권 모델로 재조명됐다. 프리츠커상 심사위원회는 “공과 사의 경계를 모호하게 허물어 건축을 통해 사람이 모이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공헌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전했고, 야마모토는 “나는 작품성을 추구하는 타입의 인기 건축가가 아니고 흐름에서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놀랐다”며 “오래된 작품도 포함해 공동체와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매우 기쁘다”고 답했다.
건축가는 우리가 사는 곳의 폐해를 해결하는 이들이다. 심지어 도시의 미래를 내다보며 올바른 방향을 제안하기도 한다. 건축가의 솔루션은 하루아침에 드러나는 변화가 아니며, 그것이 바로 10년도 더 된 야마모토의 판교하우징을 올해의 건축으로 꼽은 이유이다. 야마모토의 건축에 대해 읽고 쓰면서 아침에 일어나 공용 텃밭에 물을 주고 10분 거리의 작업실 겸 북카페로 향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 ‘어디에 사야 하는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유익하고 설렌다는 걸 알려준 건축적 사건이었다.
백가경(<에비뉴엘> 피처 에디터)

올해의 클래식, 자코모 푸치니
이탈리아가 낳은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가 올해 서거 100주년을 맞았다. 작곡가 안톤 브루크너의 탄생 200주년, 가브리엘 포레 서거 100주년이기도 하지만 국내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가 가장 화려하게 빛났다. 이는 푸치니와 오페라의 대중성에서 기인한 듯하다. 푸치니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음의 ‘빈체로’는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선율이다. 이 외에도 ‘별은 빛나건만’ ‘어느 맑게 갠 날’ 같은 서정적인 아리아들은 청중의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더불어 오페라는 종합예술극으로 노래와 연기, 화려한 무대와 연출을 모두 볼 수 있는 오감 자극형 예술이다. 이에 따라 오페라 특유의 대규모 프로덕션과 스타 캐스팅이 공연예술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 것은 올해 10월, 이탈리아 ‘아레나 디 베로나 축제’의 <투란도트> 현지 프로덕션을 그대로 옮겨와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막을 올린 <2024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이었다. 티켓 최고가는 55만 원이었다. 초대형의 세트는 컨테이너 50여 개에 실어 배로 옮겨왔다. 오페라계의 신화적 인물인 프랑코 제피렐리의 연출작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념비적 공연임은 분명했다. 화려한 내한의 발걸음에는 미국도 참여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오페라 공연을 자랑하는 극장,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전속 오케스트라가 처음으로 내한한 것. 푸치니의 작품을 다루지는 않았지만 지휘자 야닉 네제 세갱과 함께 최고의 현역 오페라 가수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 베이스바리톤 크리스티안 반 혼, 소프라노 리제트 오로페사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한편 초호화 캐스팅이 낳은 부작용도 있었다. 서울시오페라단은 푸치니의 <토스카>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를 캐스팅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를 보기 위해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지만, 공연 마지막 날 해프닝이 벌어졌다. 공연이 마무리될 무렵 상대 배우의 앙코르가 이어졌는데, 게오르규가 무대에 등장해 음악을 멈추고 “이건 오페라 공연이지 개인 리사이틀이 아니다. 나를 존중하라”고 항의한 것이다. 오페라에서는 종종 뛰어난 독창성을 선보인 성악가에게 관객이 큰 환호를 보낼 경우 극의 진행을 잠시 끊고 아리아를 앙코르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오페라가 종합예술극이라는 특징을 다소 해치는 관례이나 청중을 위해 벌이는 이벤트기도 하다. 이후 오페라단은 게오르규 측에 사과를 요청했지만, 그녀는 “공연 전 앙코르를 하지 말아달라는 뜻을 분명 전달했으나 존중받지 못했다”며 사태에 대한 유감을 표했다.
한 해를 떠들썩하게 했던 푸치니의 음악들이 지나가고 있다. 마음을 가득 채우는 푸치니의 음악은 올해가 지나도 영원히 빛날 것이다. 오페라계의 오랜 스테디셀러, 푸치니의 음악으로 연말을 채워보면 어떨까? 12월에 꼭 어울리는 작품으로는 <라 보엠>을 추천한다. “그 모든 것은 제게 기쁨을 줍니다. 달콤하게 저를 부르고, 사랑과 청춘을 이야기하죠. 그 꽃들은 꿈과 환상을 속삭여요. 이것들이 제게는 시와 같은 거예요.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 중에서)
허서현(월간 <객석> 기자)

<2024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의 한 장면.

올해의 술, 조니워커 블루 아이스 샬레
올해 가장 ‘열일’한 위스키 브랜드를 꼽자면 단연코 조니워커다. 넷플릿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 2와 함께한 한정판 보틀,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유명 셰프와 협업한 ‘조니워커 블루 일루시브 우마미 에디션’ 등 혁신적인 제품을 계속해서 선보였다. 그 가운데 정점을 찍은 프로젝트는 퍼펙트 모먼트와의 협업으로 선보인 ‘조니워커 블루 아이스 샬레’다. 퍼펙트 모먼트는 프랑스와 모나코 기반의 럭셔리 스키웨어 브랜드로 특히 해외에서는 비욘세, 킴 카다시안, 지지 하디드 등의 셀럽이 즐겨 입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니워커는 스키코어 트렌드에 발맞춰 차가운 눈 속에서 마시는 공감각적인 위스키 한 잔의 매력을 담아냈다.
조니워커 블루 아이스 샬레는 혹독한 겨울 스코틀랜드 고지대에 자리한 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위스키를 블렌딩했다. 조니워커 최초의 여성 마스터 블렌더인 엠마 워커는 이렇게 말한다. “알프스 겨울의 풍미와 달콤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의 따뜻함을 조니워커 블루 특유의 깊은 풍미에 더했어요. 바닐라, 정향, 스파이시한 사과의 풍미와 은은한 스모키 향이 어우러지며 벨벳처럼 부드러운 위스키예요.” 특히 위스키 애호가들이 흥미로워할 지점은 그동안 쉽게 만나볼 수 없었던 브로라 증류소의 희귀한 원액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스모키한 풍미로 유명한 브로라의 희귀한 빈티지 위스키는 경매 시장에서도 높은 가치를 평가받으며 컬렉터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많다. 이 외에도 클라이넬리시, 달위니 등 고도가 높은 최북단의 증류소에서 생산된 원액을 블렌딩했다. 1만 개 중 단 하나의 캐스크만이 그 기준에 부합할 만큼 진귀한 원액으로 만들어 ‘블렌딩의 예술’을 보여주는 위스키라고 할 수 있다. 체온이 내려가면 위스키의 맛은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조니워커 블루 아이스 샬레는 설원에서 생동감 넘치는 스키를 즐긴 후 모닥불 앞에 모여 홀짝이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위스키다. 영하 5도의 차가운 상태에서 마셔보면 위스키의 텍스처가 한층 더 깊게 느껴진다. 입안에 위스키를 머금고 천천히 음미해보면 솔티드 허니, 카카오, 부드러운 몰트의 풍미가 증폭된다. 해가 저물 무렵의 ‘블루 아워’를 만끽하며 자연 속에서 이 위스키를 즐겨볼 것을 추천한다.
김소라(주류 칼럼니스트)

올해의 전시,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거대한 태피스트리나 정교한 자수 작품 앞에서 번번이 감탄하게 되는 이유는 그야말로 시간과 노동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무수한 시간 동안 실과 손을 놀려 완성한 작품은 묵묵하고 치열한 노동의 시간을 응축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결코 고군분투한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 점이 특히 경이롭다. 올해 5월부터 8월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전은 19세기 이후에 꽃피운 한국 자수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보인 자리였다. 자수는 오랫동안 주류 미술사의 관심 밖에 있던 장르다. 게다가 한국 전통 자수라 하면 흔히 조선 시대 규방의 여성들이 제작한 자수를 떠올리게 되며, 근대기 이후의 자수 역사는 좀처럼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 전시는 알려지지 않은 귀한 자수 작품들을 펼쳐 보이며 주목해야 마땅한 예술가들을 새로이 호명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학예사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을 간 한국 여성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전시의 시작점이라고 말했다. 당시 자수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갈 정도면 유복한 가정의 자녀였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나 작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의 조카 나사균이다. 나사균은 일본에 건너가 고모 나혜석과 같은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회화가 아닌 자수를 전공했다. 이 전시에서 선보인 나사균의 작품 ‘축계’는 졸업 작품으로, 대나무 숲 속에 있는 닭 볏의 입체감과 깃털의 부드러운 흩날림이 인상적이다. 나사균의 작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결혼 후 자수 작업을 내려놓고 여성의 지위 향상과 사회복지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어머니나 할머니로부터 전수되던 자수는 20세기 초에 ‘수예’라는 이름으로 공적 영역에 편입되며 여성 교육의 핵심이 되었다. 당시 여성 교육의 목적은 ‘여자에게 적당한 우미(優美)의 예술을 가르쳐 안으로는 현모양처가 되고 밖으로는 문명을 보완하는 기술자나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여성들은 바늘을 들고 훨씬 더 먼 곳으로 나아갔다.
추운 겨울날 유리창에 맺힌 얼음 결정에서 영감을 받아 환상적인 어둠을 드리운 작품,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독서를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담은 작품, 자수를 매개로 마음과 정신의 풍경을 표현한 추상적인 작품 등은 자수는 순수예술이 아니라는 당시의 편견을 당당하게 뒤엎으며 실과 바늘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했다. 이번 전시장에서 가장 많이 들려온 소리는 “자수가 아닌 그림 같다”는 탄성이었을 것이다. 다양한 색실을 엮고 겹치고 매듭짓고 수를 놓아 물감으로 표현하기 힘든 풍성한 입체감을 만들어낸 작품들은 실과 바늘이 얼마나 유연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고, 자수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노동의 시간이 자유로운 창조의 시간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해보게 했다. 재기와 근성, 그리고 장인 정신을 수호한 예술가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명징한 시대의 기록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전시장에서 이들의 손끝을 좇으며 감탄하던 시간은 올해의 기록할 만한 순간이다.
김지선(<에비뉴엘> 피처 디렉터)

엄정윤 작가의 자수 작품 ‘유리창에 서려든 성에의 자연’.

Editor
KIM JISEON, BAEK KAKYUNG
PHOTOGRAPHER
이현석 COURTESY PHOTOS,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