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ARTISTIC ALCHEMY
16세기 이탈리아 저택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디자이너 키아라 라바이올리.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빈티지 가구들과 1600년대 태피스트리가 포르니체 오브제의 모던한 토템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고풍스러운 대저택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 디자이너 키아라 라바이올리(Chiara Ravaioli)는 예측할 수 있는 길을 벗어나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실험하고 있다. 고색창연한 외부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모든 것이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고개를 뒤로 확 젖혀야 두 눈에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높은 천장의 프레스코 벽화는 1700년대 후반에 그려졌고, 그 아래에서는 3D 프린터가 도자기를 만들어낸다. “세월을 간직한 건물은 마치 변덕스러운 노인 같아요.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죠.” 솔직한 그녀의 말에 유서 깊은 공간과 함께한 시간과 그동안의 수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93년 라벤나에서 태어난 키아라 라바이올리는 도시의 예술적 DNA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라벤나가 자리한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는 단순한 지역명이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이자 라이프스타일이에요. 열정, 헌신, 정체성 그리고 예술적 전통이 혼합된 곳이죠.” 그녀는 7년 전 런던예술대학교에서 공간디자인을 전공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3D 프린팅 기술과 장인 정신을 결합한 브랜드 ‘포르니체 오브제(Fornice Objects)’를 설립했다.
클래식한 프레스코 벽화 천장과 대담한 핑크 컬러로 완성한 독특한 매력의 다이닝 룸.
16세기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저택은 그녀의 예술적 여정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공간이다. “각 공간은 선조들의 오래된 가구들을 복원하는 것에서 시작해 현대 작품들과 경쾌한 색조를 더해 완성했어요. 과거와 현재의 관계가 프로젝트의 출발점이었죠.” 쨍한 라임그린 컬러로 채색되어 있는 주방에서 그녀가 말을 보탠다. 맞은편에 길게 자리한 창문으로 햇빛이 공간을 조각하듯 들어오고, 견고한 나무로 만든 아일랜드와 강철 가구는 포르니체 오브제의 도자기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동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핑크빛 다이닝 룸에서도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하나의 스타일로 어우러진다. 천장의 프레스코화와 나무 바닥, 스틸과 유리, 샹들리에와 벽에 걸어둔 작품까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하다. “이런 공간에서 일하면서 산다는 건 행운이에요. 때로는 안식처, 때로는 창의적인 실험실이 되어주죠.”
왼쪽 2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가면 꽃무늬, 기하학적 무늬가 어우러진 화려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폴리(Pauly)의 샹들리에가 웅장함을 더한다.
오른쪽 거실 한편에 놓인 아이코닉한 팬톤 체어.
1층에 자리한 거실은 키아라 라바이올리가 가장 애착하는 공간이다.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공간을 가구와 오브제를 활용해 경쾌한 리듬이 흐르도록 디자인했다. 카를로 스카르파(Carlo Scarpa)의 코르나로 소파, 플래트너 체어, 폴트로나 프라우(Poltrona Frau)의 조키 체어, 그리고 그녀가 아끼는 멤피스(Memphis)의 매디슨 램프까지. 시대를 초월한 디자인 거장들의 작품이 한데 모여 독특한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형태와 색상을 직관적으로 사용했어요. 그래서 생동감이 넘치죠.” 키아라 라바이올리는 미팅과 미팅 사이의 짧은 휴식 시간에 거실에 앉아 햇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그 순간만큼은 거실이 아닌 ‘생각의 방’이 된다. “여기서 제 아이디어가 실행할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포기해야 할지를 고민해요.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제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는 거예요.” 공간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하루의 리듬을 만든다. 아침의 에너지가 가득한 주방, 창의적 영감이 피어나는 거실, 그리고 하루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2층의 깊이 있는 보랏빛 침실까지. “색은 우리의 감정을 담는 그릇이에요. 우리는 매 순간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죠.”
왼쪽 입구부터 이어지는 담백하고 서정적인 분위기가 저택의 첫인상을 결정짓는다.
오른쪽 포르니체 오브제 작품들 사이에서 포즈를 취한 키아라 라바이올리.
천년의 역사를 품은 라벤나에서 모던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라벤나의 모자이크 양식과 문화유산은 세계적인 보물이에요. 저는 이 유산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싶었어요.”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고대 건축물들이 그녀의 작품들과 대화를 나누는 듯하다. “제가 마치 개척자가 된 것 같았어요. 밤낮으로 실험하면서 도자기를 반죽하고, 중력을 거스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에 대해 고민했죠.” 처음 3D 프린터와 마주했을 때를 회상하는 키아라 라바이올리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주로 기술적인 면에 집중하는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여성 디자이너로서 세심한 시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세련된 취향과 안목을 지닌 대중에게 새로운 시대를 알리고 싶었거든요. 작품은 단순히 공간을 꾸미는 용도로서만 접근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대중에게 어떻게 어필할 수 있을지 탐구한 결과물이기도 해요.”
도자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재료는 손이다. 흙의 질감을 결정하고 습도를 조절하고 형태를 상상하는 것 모두 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도자기 작품은 느리지만 섬세한 과정을 거친다. “사람들은 3D 프린팅 작업 과정이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매우 느려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거든요. 하지만 실수한 도자기나 남은 점토를 다시 반죽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죠.”
진한 퍼플 톤의 벽과 1700년대 태피스트리로 안락함을 더한 침실.
최근 키아라 라바이올리의 실험은 더욱 혁신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바로, 완전히 생분해 가능한 소재 사용이다. 토마토 껍질, 쌀, 버드나무 같은 식물 폐기물로 만든 재료들은 도자기에 물성은 물론 독특한 색감을 부여한다. “더 이상 환경을 외면할 수 없었어요. 버린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색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 정말 놀라워요. 온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선반 위에서 빛을 받으며 미묘하게 다른 색조를 띠는 꽃병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키아라 라바이올리의 작업실 한편에는 수많은 실험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실패한 실험도 있고, 우연히 발견한 것도 있다. “완벽한 결과물을 만드는 일보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재료와 현대 기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여정, 그것이 제가 사랑하는 일이에요.” 저물녘이면 그녀의 집은 또 다른 무대로 변모한다. 프레스코화에 비치는 노을빛, 도자기에 반사되는 따뜻한 조명, 그리고 수백 년의 기억을 간직한 벽들 사이로 스며드는 새로운 에너지까지. 키아라 라바이올리는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로 계속해서 새로운 가능성의 경계를 넓혀가고 있다.
Editor
BAEK KAKYUNG
Photographer
MONICA SPEZIA
WRITER
WOO JUYEON